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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을 하니 일일이 이름을 바꿔야 하네요.
0900518 법학과 3학년 김서준입니다.
김충원은 제 예전 이름입니다.
연락처: 010 5435 8638
각주는 맨 밑에 적었습니다.
떠도는 말들- 언어사회학 서설 1(이청준 저)
인간이 토해낸 시니피에가 결여된 쓰레기
1970년대 언론탄압의 반영
알레고리의 미학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주인공의 직업이 신문기자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공정성과 객관성이 생명인 기사, 균형 잡힌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라는 직업과 현재 주인공이 생계의 수단으로 채택한 ‘자서전 꾸며쓰기’는 정반대의 성격을 띤다. 실제 이 작품이 나오던 당시에는 정부의 언론탄압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1970년대 초반, 지방신문의 ‘일도일사(一道一社)’ 원칙에 따른 통합과 서울의 언론사가 폐간되었으며 정부 각 부처의 출입처를 줄이고 출입기자의 숫자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보도증(프레스카드)제도의 실시로 2287명의 기자들이 해직되기도 했다. 이 작품 속 주인공 또한 침묵과 왜곡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기자직을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 당장 먹고살아야 할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자서전을 쓰고 있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은 여전하기에 표의와 표기가 철저히 분리된 말을 쓰면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하는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는 문장은 언론탄압의 시대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도시화의 진행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이 현저히 줄어듦에 따라 대화의 깊이가 피상적으로 한정된 소통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의 자의성-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의 분리
언어의 자의성1)에 따른 기표와 기의의 분리는 언어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 또한 헛된 말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에 완벽한 객관성과 진실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해야만 말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매끄러운 말의 기저에는 확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뒤섞여있는 것이 언어의 실체임을 말하고 있다. 언어의 자의적 구조를 집요하게 말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은 ‘신중히 내뱉은 말조차 어쩔 수 없이 기표와 기의의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할진대 하물며 인간의 무책임한 발설로 태어난 말들은 얼마나 큰 기표와 기의의 간극을 떠안고 표류하겠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이 작품 또한 ‘존재의 집’이어야 할 말의 실체가 인간의 무책임한 발설로 텅 빈 말이 되어버렸음을 핵심적인 문제인식으로 설정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한 적용가능성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쓰였음에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게 해준다. 점점 피상적인 소통에만 집중하게 되는 가운데 소외감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것이 될 수도 없고 자기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되는 코미디언의 말과 웃음들이 우선적으로 그것을 말해준다. 코미디언의 말과 웃음은 자신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것들이어야만 쉽게 청중의 것들이 될 수 있다. 자기의 것에 주목할 수 없고 그나마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것, 우습고 가벼운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코미디언의 삶은 우리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본인 고유의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꺼려하기 시작했다. 순전히 자신만이 느낄 수 있고 자신과만 결합된 문제를 타인에게 말한다면 그 말들은 필시 그들에게서 탁구공처럼 튕겨 나오기 마련이다. 마음을 기울여 경청을 해야만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이미 그들 또한 나름대로의 문제에 지쳐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피상적인 대화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인간관계는 진지함이 결여된 유희 중심적인 관계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깊이와 진정성이 결여된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가 아닌 내면의 대화를 갈망하였다. 아무런 장막 없이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가 부담스럽다 하여 진짜 대화까지 차단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급속도로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간은 진짜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다는 순기능뿐 아니라 익명성이란 가면 뒤에 숨어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역기능을 양산했다. 본인의 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책임의 경감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확실하지 않고 근거가 없는 거짓말을 무분별하게 퍼뜨리기에 이른다. 과장되고 부풀려진다 해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시작된 말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은 그저 재미를 위해, 상대방의 흥미를 끌기 위해 약간의 살을 붙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으로 동일한 과정에 참여하면서 거짓은 진실로 둔갑하고 말은 걷잡을 수 없이 오염된다. 때로는 ‘타진요’ 사건처럼 거짓말들이 진실을 덮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추측성 발언, 허황된 말, 함부로 내뱉고 새롭게 거짓 양산되고 부풀려지는 과정 속에서의 말은 본래의 근원에서 멀어짐으로써 고향을 잃어버린 꼴이 된다. 경솔하게 태어난 말들, 더러운 언어로 태어난 말들은 머무를 곳을 찾아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의 주인이 되길 자처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익명성이란 가면을 쓰고 숨어버릴 뿐이다. 결국 불우한 운명으로 태어난 말들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한 말들은 표류하는 언어가 되어 ‘~카더라’라는 형태로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과 거짓의 기본적인 구분점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남의 불행을 거들먹거리며 비열한 웃음을 띠거나 쾌락을 느끼는 그릇된 인식을 조장하며 대중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한다. 말의 본래적 기능은 배반당한지 오래인 것이다.
타인과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배려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면 함부로 뱉은 말들은 그 최소한의 의무조차 띠고 있지 않기에 실존의 의미가 현저히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뻔뻔하게 통화를 가로채거나 다른 말의 소굴을 약탈하려 들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 안에서는 실질적인 소통이 결여된 피상적 대화의 범람과 우리들의 표면적인 자세가 부각되고 있다. 혼선, 오접, 착각 아니면 고의에 의한 장난들. 그 수단이 전화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갔을 뿐 우리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토록 말을 아끼고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은 실제 생활에서 참다운 대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온갖 잡다한 말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세태 안에서 말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기란 만만치가 않다. 온갖 스팸에도 끝내 전화선을 뽑아버리지 않고 꽉 찬 말을 찾아다닌 주인공조차 말들의 괴롭힘만 당하다가 끝내 운전수에게 말의 복수를 되돌려주기에 이르는 것이다. 택시기사에게 텅 빈 말을 함으로써 떠도는 말을 만들어내는 지욱의 모습은 무의식중에 말의 복수가 횡행하는 사회에 적응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진의를 담아낼 수 없는 언어2)이기에 더욱 신중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말을 잉태해야 하며 그러한 책임은 오염된 언어가 무질서하게 표류하고 있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요구되는 것임을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각주
1) 우리말로 '희다'고 하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화이트(white)'라고 하기도 하고 '블랑(blanc)'이라고도 한다. 언어의 소리와 의미 사이의 이와 같은 관계를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어떤 소리와 그 소리가 나타내는 개념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라는 뜻이다.
2) 여기 휴대전화가 놓여있다. 이것을 휴대전화라고 표현하는 순간 이것은 휴대전화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휴대전화가 갖고 있는 의미를 휴대전화라는 용어가 전부 다 나타낼 수는 없으므로 휴대전화의 의미는 한정되어진다. 즉,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므로 언어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띨 수밖에 없지만 휴대전화라는 사물을 제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 또한 언어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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