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 가려진 진실
개인들마다 가지고 있는 천차만별의 감정들 여러 가지. 그것들이 만나 얽히고설켜 덩굴을 이루면 표면적인 경우의 수는 늘어나고 사건의 진실은 그 밑으로 감추어진다. 이성이 가진 결단력과 냉정함의 속성은 일방성과 차가움으로 표상된다. 수많은 가지로 이뤄진 덩굴을 끊어내어 진실로 관통하려던 이성의 칼은 수많은 가지들 앞에 날이 무뎌져버린다. 그 과정에서 끊어진 감정들 여러 가지는 타인의 상처를 대변하고 소통의 문은 굳게 잠긴다. 하나하나로서의 개체의 감정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끊어냄이 아닌 매듭을 풀어가는 심정으로 타자의 감정선 위에 서보는 일. 그것은 오랜 시간을 소요하고 숱한 난관에 봉착해도 결국은 가장 빨리, 그나마 정확하게 진실을 향해가는 방법이 아닐까.
냉철한 이성으로 사건을 파악하려던 형사의 노력.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건의 어이없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나는 이성의 일방성에 따른 우매함과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객관성에 근거하여 이성을 너무 옳은 기준으로만 맹신한 것은 아닐지, 주인공이 본능적인 것을 갈구하면서도 이성의 틀에 그동안 자신을 가둬온 것은 아닐지란 생각이었다.
여러 사람의 감정이 뒤섞인 사건을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직업은 형사. 어느 감정에 치우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형사이다. 개인만이 알 수 있는 마음, 그것들이 엉켜 만들어진 복잡한 형상들은 여러 타자의 감정과 상호작용을 속속들이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진실은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최대한 공정성을 확보하고 주관성을 배제하기 위해 이성과 사실의 방법이 동원되지만 그렇기에 개인들의 진실을 담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명제의 참, 거짓을 판별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증거의 방법을 채택하는 이성은 사실에 근접해있고 감정은 진실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사실은 객관적이고 명확하지만 언제나 진실을 말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왜곡시키는 도구로 오용될 때도 있다. 정명식은 사실이 갖고 있는 빈틈과 사실을 바라보는 이성의 우매한 시선을 이용하여 ‘경희, 사랑해’라는 사진이 불륜관계의 증거가 아님을 입증해낸다.
이성으로 점철된 취조의 과정 속에서는 일방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형사의 질문은 빈틈을 노리는 분명 예리한 것이지만 참, 거짓을 가려내기 위한 기계적 질문같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이성은 사사로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객관성을 띠고 일방성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일방적으로 소통하는 노트북, 카메라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진실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단편화된 사실만을 찍어낼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명료한 언어, 증거, 사실들은 일방성으로 인해 그 의도와 생각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란 이성과 사실을 맹신하는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의 내면에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있으므로 감정의 방법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어 비춰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주인공 형사는 여러 개로 매듭지어진 감정들 중에서 자신의 경험과 결부된 하나의 감정을 무의식중에 채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이 죽은 날, 다른 남자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는 지경희를 보며 형사는 아내의 불륜을 상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경희는 남편과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아이도 생기지 않았으며 지겨웠다고 고백한다. 이런 모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고 밤샘 수사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형사남편을 둔 탓에 혼자서 무료해했을 아내를 떠오르게 했을 것이다. 지경희와 주인공 아내의 유사성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그는 분노했으리라 생각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가며 이성의 방법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형사는 의외의 진실을 마주하게 될 뿐이었다.
껍질이 벗겨지는 행복한 꿈
껍데기가 아니라 껍질이다. 딱딱하고 두꺼운 것을 연상시키는 껍데기에 비하면 껍질은 본래 좀 더 얇고 가벼운 무엇이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못하다. 형사라는 직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과도한 엄격함과 냉소 어린 시선은 그를 편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에 따라 껍질은 단단해지고 두꺼워졌다. 이런 그가 자신의 껍질을 의식하면서도 철저히 무시하였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을 취조과정에서 발견하지 않았나싶다. 습관화된 이성이 자신을 항상 진실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는 점, 지경희에게서 느낀 욕정과 지경희처럼 무료했을 아내를 생각하며 진실에 할 발짝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경희를 보며 느낀 욕정은 주인공의 진실과 욕망, 억압된 무의식, 본능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아내의 감정을 느껴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진 것 같다. 사실은 자신도 본능으로서의 그 무엇을 갈구하고 감정적인 것을 추구해왔지만 이성의 틀에 얽매어온 것은 아닐까란 자문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내의 불륜 당시, 그는 불륜남을 총으로 위협하는,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이불을 갖다버리라고 소리만 질렀을 뿐.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미치도록 화를 내거나 살림을 뒤집어엎어도 모자를 판이거늘, 그는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이성적인 그에게는 이 사건이 확실한 불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래서 더 알아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감정 이해라는 것이 전혀 필요치 않을 만큼 더럽고 추악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남자만을 위협함으로써 아내와 자신 사이에 커다란 소통단절을 불러일으켰다. 아내는 차라리 자신에게, 적어도 자신에게도 화를 내달라고 절규하고 싶었으리라.
정상적인 감정의 소모조차 행하지 않고 침묵하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극심한 공포와 죄책감을 경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남자가 오줌을 지린 이불을 힘껏 발로 밟아대며 빨래하는 장면은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아내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더러운 진실과 관련된 어떠한 말이라도 내뱉어야만,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해야만 살 것 같은 간절함에 종교를 통한 소통의 수단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형사는 지경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아내의 감정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아왔으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얼마나 강렬한가, 부도덕해서 감춰져야만 하는 것들, 발산될 수 없기에 더욱 강해지는 본능의 감정들은 껍질을 뚫고 나오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성을 조롱하는 사건의 결말, 지경희를 통한 욕정은 형사로 하여금 이런 것들과 아내를 바라보는 것의 첫 단추를 꿰어준 것이다.
형사는 세상의 잣대와 이성의 껍질 안에 갇혀 살아온 자신을 발견하고 사실 나도 지겨움과 탈출욕구를 느껴왔다고, 본연의 모습을 갈망한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날카로움으로 중무장한 차가운 이성. 그것보다는 한 꺼풀만 들춰내면 드러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욕망의 불꽃에 불이 화르륵 붙고 습한 곳에 잠겨있던 본능이 시원한 바람을 만나 하~하고 상쾌한 숨을 몰아쉴 것만 같은 그것. 그 또한 자신을 지나치게 옭아매는 갑갑함의 총체를 벗겨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해방의 욕구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어 이불을 죽어라 빨아대던 아내의 발을 꼭 잡음으로써 외면했던 진실과 감정을 마주하려 한다. 이런 그의 시도는 꿈속에서 과일이 되어 아내에게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의 행복으로 구체화된다.
이성을 뚫고 오르는 본능적인 감정과 욕망에 대하여
인간 모두가 아무 거리낌 없이, 검열기제 없이 날뛸 수 있다면 어떤 사회가 도래할 것인가. 공존을 위한 질서와 규칙이 무시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 무한 이기주의를 넘어서 생명까지도 위협당하는 살벌한 이기주의, 대혼돈의 세상을 예측하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본능과 직결되는 욕망과 감정은 도덕률의 위배라는 영역과 상당 부문 맞닿아있으므로 인간들은 그것을 죄악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정형화된 이성으로 난잡하고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 거듭나기 위한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 있어 기초적이고 궁극적인 요건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이성을 앞지르는 감정과 욕구들이 터부시돼온 것이다. 강렬한 욕망이 이성의 벽을 뚫고 오르지 않도록, 일단 뚫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성해질 욕망의 번식성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이성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었다. 대표적으로 철저한 이성과 도덕으로 금욕을 실천하려 했던 스토아학파를 들 수 있는데 사실 그들 또한 완벽한 통제의 불가능성을 인식하였던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 생각된다. 견고한 이성의 두께를 더해감으로써 충동적인 감정, 욕구를 덮는 것이 최선이라는 전제를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처럼 이성이 고평가되었던 저변에는 본능적인 일차원성의 그것들이 있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주인공, 껍질 안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
근래에 들어서는 이성에 대한 당위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사람들을 옥죄는 가치규범으로 과대 적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 같다. 올바른 잣대로 평가되었던 이성이 뒤틀리고 비꼬아진 이 작품 속에서는 지나치게 고평가된 이성의 무지함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주인공인 형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사람, 삶에 찌들고 힘들어도 감정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자화상으로 보여 진다. 안 그래도 힘쓸 일이 많은데(정확히 말하면 ‘과업’이라고 표현돼야 할) 쓸데없는 감정소모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며 가면을 쓴 듯 괜찮은 척, 쿨한 척하는 우리들의 습관화된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한때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그러나 지금은 강도, 강간, 살인에 무감각해질 만큼 영락없는 형사가 되어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랑이란 없다고, 쓰레기들을 대하면서 모든 게 쓰레기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처럼 냉소어린 모습은 엄격한 잣대의 적용으로 오히려 껍질을 깨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연결된다. 적어도 동의한 적 없는 규칙들을 자신의 삶에 대입시키며 잔뜩 움츠린 사람들, 두꺼운 껍질을 만든 장본인이 본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 일상에서의 탈피를 꿈꾸면서도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시간이 이만큼이나 가있더란 말을 하는 우리들. 어쩌면 ‘어른스러움’을 강요받고 내면화하려다 차갑게 얼어버린 일련의 모습들이 주인공 속에 반영돼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단절성, 외로움의 제시
결국 이 작품 속의 욕망들은 타자와의 소통단절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는 감춰진 욕망, 진실과 연관된 진짜 감정이 외로움과 상실감이라는 것, 외로움으로 설정된 것은 고독에 빠진 쓸쓸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란 걸 알 필요가 있다. 마음으로써의 소통, 내밀한 소통이 없는 모습들은 어쩌면 잘못된 욕망보다 더욱 부각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