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성을 잃은 한 여자의 삶, 그리고 그 시대

'탁류'는 군산을 배경으로 식민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일인 중심의 신흥 도시와 한국인들의 거주지로서의 빈민가를 대립적 구조로 설정하여 하층민들의 몰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삶의 모습을 그려냈다. 금강의 물이 탁하다. 그 물은 황해 바다에 탁류 째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한다.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에 있는 시가지가 군산의 항구다. 이야기는 여기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군산에 미두라는 투기 노름이 성하던 때에 군고원을 지낸 정 주사에게는 자녀가 네 명이 있었다. 큰 딸 초봉, 둘째 딸 계봉, 큰 아들 형주, 작은 아들 병주이다. 큰 딸 초봉이는 아버지 정 주사가 미두에 미쳐 가계가 어렵게 되자 양약국인 제중당에서 일하게 된다. 혼인할 나이인데다가 미인인 초봉이를 눈독 들이는 사내들이 많았다. 제중당 주인인 박제호, 은행원인 고태수, 금호병원 조수인 남승재 등이었다.초봉의 마음은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 의학도 남승재였다. 그러나 초봉은 워낙에 수동적인 성격이었고, 운명 또한 이들을 맺어주지 않았다. 초봉이를 서울로 유인하려던 박제호는 자신의 아내의 훼방으로 실패하였다. 결국 초봉이는 매파에게 홀린 부모의 권유로 고태수와 결혼하게 된다. 초봉이의 아버지 정 주사 뿐만 아니라, 어머니 유씨도 물질적인 풍요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은행원 고태수가 자신의 집안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초봉이 풍족한 생활 속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가난한 의학도 남승재를 사랑하면서도 부모의 권고대로 고태수와 결혼을 한 것이다. 고태수와 결혼한 초봉은 결국 속물화된 세계에 의해 짓밟히는 여인이 되고 만다. 신교육을 받았고 예쁘며 기품이 있는 초봉이였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주견이나 의지가 결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초봉과 고태수의 결혼 생활은 뜻하지 않은 비극으로 종말을 지었다. 고태수는 미두에 손을 댔다가 은행 돈을 몰래 사용한 것이 탄로 나서 경찰에 쫓기는 몸인데다가, 전부터 하숙집 안주인과 내통하던 사실이 탄로 나서 그 집주인에게 몽둥이로 연신 두드려 맞은 뒤 죽은 것이다. 고태수가 죽게 된 사건에는 꼽추인 정형보가 개입되어 있었다. 고태수가 죽고 오래 전부터 초봉을 사모하던 정형보는 그녀를 겁탈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초봉은 무작정 서울로 가는 호남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가야하는 그녀는 기차를 갈아타러 플랫폼으로 나와 기차를 기다리는데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박제호였다. 초봉은 그날 저녁 박제호와 함께 유성으로 가 한 이부자리에서 잤다. 초봉은 그날 저녁 박제호와 관계를 맺은 기억은 없다. 즉, 남녀가 같은 방에서 함께 잤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는 말이다. 박제호는 유성 온천에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부터 초봉이를 '우리 괭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초봉이는 하루 사이에 박제호의 첩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느끼게 되었다. 그라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고태수와 결혼을 하고 정형보한테 열흘 만에 겁탈을 당했으며 다시 보름 만에 박제호를 만났으니, 대체 이게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만약 박제호의 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고태수의 아들이라면 딱할 노릇이다. 정말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초봉은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약을 먹었으나 호되게 고생만 했다. 결국 유산은 안 되고 다음해 삼월 보름에 딸을 낳아 이름을 송이라고 지었다. 성은 고, 장, 박 그들 셋 중 한 사람 인 것은 분명했으나 그것을 알아낼 길은 없었다. 딸 송이에게만 정성을 쏟는 초봉이에게 박제호는 곧 싫증을 느끼게 되고, 그 때 정형보가 나타나 송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하며 초봉이를 박제호에게서 빼앗아 간다. 초봉이는 자기 신세를 서러워하면서도 정형보에게 돈을 요구해서 친정의 살림을 펼 수 있게 도왔다.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와 어머니 유씨는 결국 고태수가 아닌 정형보에게 돈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초봉의 부모는 객관적으로는 물질적인 안정을 위해서 자식을 희생시킨 부모였다. 한편, 초봉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기 때문에 부모의 의사에 따라 자기 운명이 파국에 치닫게 되고, 고태수, 정형보, 박제호에 의해 농락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희생으로 집안을 일으키는 효성이라는 봉건적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오직 딸 송이를 향한 애정만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정이었다. 초봉은 정형보와 반 년 남짓 사는 사이에 바보스러워 졌다. 그녀는 형보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남편이었던 고태수를 죽게하고, 자기에게 겁탈을 서슴지 않고, 박제호에게서 자신을 빼앗은 것이 바로 꼽추 정형보라는 것을.초봉은 그를 살해해야 하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정보는 점심 후 나간 초봉이가 약속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딸아이 송이를 거꾸로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초봉이 들어서자 아이를 구석에 던져버린다. 초봉이 화를 참지 못하고 정형보의 급소를 때렸다.정통으로 급소를 맞고 쓰러진 정형보. 초봉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독약을 마시려 한다. 하지만 집으로 찾아온 남승재와 그녀의 여동생 계봉이 그동안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초봉은 남승재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자살 대신 징역살이를 하기로 하며 이야기는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은 1930년대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자기의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다. 맨 처음 초봉이는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부모에 의해 신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미두에 가계가 기울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정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순종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성이 된 것이다. 두 번 째로 박제호는 양약국을 운영하는 사내이고, 이미 혼인을 한 기혼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초봉을 탐내왔다.그 때문에 아내와 여러 차례 갈등을 일으킨다. 나중엔 초봉을 찾아와 초봉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마저도 비극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봉을 첩으로 들이고, '우리 괭이'라고 부를 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인물 이었다. 세 번째로 고태수. 그는 그저 물질만을 밝히는 부모에 의해 혼인한 사람이며, 그는 은행 직원으로써 겉모습은 안정적이고 성실하나 그의 뒷모습은 비리가 많은 공무원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두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퇴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도 굳은 심지를 가진 인물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초봉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숙집의 안주인을 탐내다 집주인에게 두들겨 맞아 죽고 만다. 그것이 고태수의 최후이다. 네 번째로 정형보. 정형보는 가장 오랜 시간동안 초봉이를 사모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초봉이를 사모하고 있는 만큼 연민의 마음도 커졌고 그리고 그녀에 대한 미움의 마음도 커져만 갔다. 그는 초봉을 얻어내려 고태수의 일들을 고자질 했고 박제호 에게서 초봉을 빼돌렸다. 그는 그만큼 초봉을 사랑한 인간이기도 했으나, 초봉을 얻고 싶어 그 욕망에 이성을 초월하는 일을 저지른 악랄한 인간이기도 하다. 초봉에 대한 애정이 극심해 질수록 그는 더욱 히스테리하게 변해만 간다. 마지막 부분에서 송이를 거꾸로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모습은 그의 히스테리가 극에 다다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봉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그 시대에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여자들과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가부장적인 권위에 눌려 여성의 권위를 주장하지 못한 채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딱 초봉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녀들은 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순종적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뜻대로, 남편의 뜻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지금의 시대라면 이해가 가기도하고 안가기도 하겠지만 그 시대에는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다. 탁류에 나오는 초봉의 동생인 계봉은 초봉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녀는 적극적이며, 자신의 의견을 곧 잘 말하고 옳고 그름이 확실한 여자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초봉의 성격과 대조를 나타내며 작가는 초봉의 삶을 더욱 불쌍하고 처절한 삶으로 만들고 있다. 채만식은 어쩌면 초봉을 주로 하여 순종적인 여성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계봉이라는 자신감 있는 여성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탁류는 우리의 삶을 가장 가깝게 써내려간 작품이지만 1930면대의 타락한 세태와 몰락하여 가는 계층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탁류'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타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위선과 살인이 횡횅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채만식의 탁월한 인물 묘사력과 인물과의 관계, 그리고 감탄 할 수밖에 없는 채만식의 문체, 모든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흥미로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