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이라는 꽃은 어떤 꽃일까. 검은색의 꽃잎을 가진 꽃. 책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그 의미를 조금 이해를 해볼 수 있었다. 죽음의 색을 상징하는 검은 색과 희망과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가진 꽃의 결합. 이 책은 절망뿐이었던 생활 속에서 살아가려는 수많은 꽃의 씨앗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멕시코라는 희망의 땅,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 그들에게 있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썩어버린 꽃밭이었다. 그저 눈을 뜨면 하루를 사는 그런 인생과 비슷한 느낌의 나라. 적어도 그들은 그런 나라 속에서 여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움직였던, 저마다 아주 작지만 희망이라는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들이었다. 새로운 푸른 들판에 각기 다른 꽃들이 피어 새로운 꽃밭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바랐던 인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렸던 것은 더욱 검은, 조선보다도 더욱 검은 에네켄 텃밭이었다. 에네켄 텃밭에서의 그들에게 신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다 똑같은 노동자였을 뿐, ‘인간 ㅇㅇㅇ’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은 대부분 떠나온 조선에서 잡초처럼 대우받았던 이들이었고,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억압받았던 것들을 표출이라도 하듯이 그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던 이에게는 두 가지의 지옥이 동시에 펼쳐진 세계였을 것이며, 하층민의 대우를 받던 이들에겐 조선이나 별 차이는 없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에 조금은 욕망이 채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그들이 스스로 택하여 스스로를 버려지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던 땅에서 그들은 돌아갈 나라마저 잃는 상황에 처한다. 절망의 끝.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좌절할 것도 없는 현실에 처해짐을 당하게 되고, 순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다지선다형 질문이 아닌 단답형 질문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검은 텃밭에 반강제적으로 순응하게 된 씨앗들은 각기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다. 좌절하고 스스로를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또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들을 씨앗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싹이 틔고 그 싹이 죽으면 또 다른 싹을 틔우는 그런 씨앗 말이다. 살아남은 새싹들은 그렇게 또 다른 싹을 틔우기 위해 움직였다.

 제 아무리 삶이 버겁고 힘겨워도 남녀가 같은 곳에 있다면 사랑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은 인류의 법칙이며, 신이라 해도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 것이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틔워진 사랑의 새싹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둔 채, 현실에 수긍하여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가 됐든, 어느 상황이 됐든 간에 가볍게 다뤄질 수 있는 여성성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육체라는 가장 원초적인 무기로 살아가는 모습은 비참함을 넘어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불편함을 선사했다. 반면 그 불편함을 느낌과 동시에 사랑을 찾기 위한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남자라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되찾기 위해 온 몸을 다 던지는 그런 것에서 오는 무언가라고 하면 설명이 부족할까. 핍박과 배신, 절망의 현실 속에서도 아주 작은 순수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씨앗들이 죽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고 하여 사랑만이 싹트는 그런 낭만적인 내용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내 스스로가 유추했을 뿐, 그들은 그렇게 낭만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에네켄 텃밭에서 벗어난 이들 중 독립 전쟁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 전쟁이라는 것 역시 큰 굴레의 씨앗은 아닐까. 독립을 통해 새로운 혁명의 정신이 싹트고, 혁명의 성공을 통해 자신들의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는 일도 큰 의미의 싹트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격변기 속 조선인들의 가슴 속에 혁명의 불씨가 전이되었고, 잃어버린 조선을 새롭게 건립하고자 했던 ‘신조선’의 건국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이상의 씨앗을 싹틔웠다. 비록 그 새싹이 오래 가진 못했지만, 그들의 정신과 이상은 실현됐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던,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또 다른 조선은 그렇게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했다.

「검은 꽃」이라는 책 자체가 절망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으로 이뤄져있기에 시종일관 어둡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읽는 내내 생수에 먹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것처럼 나의 마음속에도 검은 무언가가 번지는 듯했다. 책에 이입하면 할수록 점점 더 우울해지고 어두워지는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주한 조선인들이 각기 자신들만의 꽃을 품은 씨앗들이라고 유추를 했을 때 뭔가 책의 새로운 단면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들이 살았던 에네켄 텃밭이나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여 잘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히 ‘줄을 선다.’ 라는 의미가 성립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가슴 속의 씨앗을 싹틔우기엔 세상이라는 텃밭이 너무나도 가혹하리만큼 검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준비된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비옥할 수 없는 토양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아직까진 너무나도 검고 척박한,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내 뿌리를 내리고 싶게 만드는 텃밭. ‘나’라는 씨앗은 오늘도 내일도 그 텃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끈임 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잊혀 진 조선인이 아닌, 에네켄 텃밭을 벗어나 새로운 싹을 틔워 행복을 맛보며 살기 위한 몸부림을 말이다.